•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당 간부 첩에 뇌물 줘야 평양 가는 현실에 탈북 결심했죠”

     ━  4·10 총선 유일한 탈북민 당선인 박충권   강찬호 논설위원 박충권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당선인(38)은 4·10 총선 유일의 탈북민 당선인이다. 북한에서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국방종합대에 입학해 탄탄대로를 걷다 탈북한 뒤 서울대 공학박사와 대기업 연구원을 거쳐 국회에 입성했다. 북한 인권단체의 선전물이나 한국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 없이, 자생적인 사고 끝에 단신 탈북한 점에서 삶의 궤적이 남다르다.   “국방대 학생조차 배고픔 달고 살아”   엘리트 꽃길 대신 탈북을 결심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국방대 3학년인 2005년 학생 간부가 됐어요. 소속 중대(학급) 80명의 사상교육을 지휘하는 요직이죠. 이 자리에 오르면 학내 보위부 지도원의 지도를 받는데, 이때 북 체제에 처음 의심을 품게 됐어요. 간부가 되자 지도원이 방으로 저를 불렀는데 시뻘건 글씨로 ‘우리의 생명’이라 적힌 액자가 붙어있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생명’이란 김일성 왕조를 뜻합니다. 지도원이 ‘네 중대 김○○ 학생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요. ‘괜찮은 아이’라고 답하자 ‘친구랑 술에 피를 타 마시며 의형제 맺자고 했다더라. 사상이 의심스러운 친구’라고 하더군요. 중대에 보위부 스파이들이 깔려있어 80명 전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더라고요. 등골이 오싹했어요. 나중에 지도원과 친해져 술자리를 하면서 ‘누가 스파이냐’고 물으니 ‘1조엔 최○○, 2조엔 조××’ 식으로 귀띔해줘요. 다 착하고 말 없는 친구들이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80명 중 8명, 10%가 스파이더라고요. 이러니 친구들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절대 못 하는 거예요  북한이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는지 그때 깨달았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어요.”     ■  「 ‘급우 중 10%가 보위부 스파이’ 알고 북 체제 회의 품어 ‘노동당 간부 내연녀에 달러 줘야 평양 배치’ 듣고 경악 북, 고교생 해킹전사 양성…스위스 은행 해킹이 방학숙제 탈북자가 ‘배신자’ 소리 듣는 현실 깨려 국회 진출 결심 」    북한 국방종합대(현 김정은국방종합대)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한뒤 탈북한 박충권 당선인은 “미사일 전공자로서 나라의 안보가 우려돼 기업 연구원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을 결단했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체제에 회의를 품게 한 계기가 이어진 건가요. “그렇죠. 국방대에서 사상교육용 ‘노작’ 수업을 하는데, 김정일이 썼다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논문을 공부해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행정명령식·병영식’이란 서방의 비판을 반박하는 내용인데 읽어보니 ‘그 비판이 맞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은 생각이 다 다른데 왜 유일사상을 강요하냐는 의심이 이어졌죠. 북한 당국은 또 남한의 ‘광우병 쇠고기’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어요. 그런데 저는 ‘남조선은 반정부 시위를 할 수 있고, 우리라면 앞뒤 안 가리고 먹을 미국산 쇠고기도 거부할 만큼 삶의 수준이 다른 나라네’란 생각이 들었죠. 북한은 배급 수준이 최고인 국방대 학생들조차 배고픔을 달고 살아요. 단백질은 한주에 두 번, 비지국·순두붓국이 전부고 고기는 명절에만 줘요. 인간의 바닥을 경험하죠. 이런 가운데 탈북을 결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깁니다.”   그 계기가 뭡니까. “졸업을 앞둔 4학년 때였어요. 국방대 졸업생은 대개 출신 지역 군수공장에 배치돼요. 한데 다들 선망하는 평양에 배치되려면 돈을 써야 해요. 액수도 정해져 있어요. 전 그걸 몰랐죠. 어느 날 평양 고위층의 아들인 한 친구가 ‘충권아, 평양 가고 싶어?’ 하더니 ‘4000달러쯤을 예쁜 여자한테 주면 돼’라고 해요. ‘예쁜 여자가 누군데?’라고 물으니 ‘노동당 간부의 여자(첩)’란 거예요. 울분이 터졌어요. 그때까지 노동당만은 썩지 않았을 거라 믿었는데, 그 유일한 믿음마저 무너진 거죠. 이틀간 잠 못 자고 고민한 끝에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탈북을 실행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2007년 국방대 졸업 후 고향 함흥에 내려간 뒤 가족을 돌본다는 핑계로 군수공장에 안 가고, 장사를 해 돈을 벌었어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탈북 브로커를 1만 달러에 고용한 뒤 2009년 3월 북·중 국경 도시 무산에 잠입해 한 달간 은신했어요. 북한이 은하 2호 발사로 축제 분위기였던 그해 4월 10일 새벽 1시가 D-데이, H-아워였습니다. 브로커가 알선해준 두만강 변 한 집에 숨어있다 개구멍으로 강둑에 진입해 엎드려 있었죠. 근처에 숨어있던 브로커가 ‘가라!’고 속삭이는 순간 맨발로 강에 뛰어들었어요. 주변에 국경경비대 초소 2곳이 있었는데 브로커가 매수해둔 대원들이 근무를 개시한 직후 입수한 거죠. (왜 맨발입니까.) 신발 신으면 소리가 나 위험해요. 워낙 적막한 심야라, 물에 뛰어들 때 ‘텀벙!’하는 소리도 굉장히 크게 들려요. (수심은.)  키가 177㎝인데 머리 쳐들면 턱까지 잠길 정도였죠. 강에 얼음이 남았을 만큼 수온이 낮았지만, 워낙 긴장해 차갑다는 느낌도 안 들더군요. 사방이 칠흑이라 건너편이 안 보였지만 브로커 얘기대로 앞만 보고 직진하니, 10분쯤 만에 중국 땅이 나타나더군요. 맨발로 마구 뛰었어요. 나중에 보니 발이 피투성인데다 동상 직전이었어요. 숲이 나타나자 브로커가 준 번호로 휴대전화를 거니 중국 측 브로커가 나타나더군요. 조선족인 그를 따라 은신처에 도착하니 도시락을 주면서 ‘북에선 쌀밥 구경 못 했을 것’이라고 해요.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사람 무시하나. 가져가라’고 소리 지르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중국 공안, 여권도 안 보고 “통과”   대한민국에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북한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되니 중국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인천행 크루즈가 운항하는 단둥까지 트럭으로 하루 넘게 달려 도착했어요. 마중 나온 한국인 브로커가 푸른색 대한민국 여권을 주더군요. 진짜 여권인데 다른 사람, 어떤 한국 여성의 여권이더라고요. 놀란 내 얼굴을 본 브로커가 ‘통과시켜주니 당당하게 내밀라’고 해요. 출국 게이트에서 중국 공안에 여권을 건네니 정말 얼굴도 안 보고 도장 쾅! 찍어 보내주더라고요. 한시름 놓고 오후 4시쯤 배를 탔지만, 배가 북한 바다를 빠져나가는 자정까지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배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브로커가 ‘경찰이 보이면 북에서 왔다고 하라’고 해요. 입국장에 들어가니 경관 2명이 있더군요. ‘북에서 왔습니다’고 하니 놀란 표정을 짓다 국정원 직원에 인계하더군요. 6일간 조사받았습니다. 북한 국방대에서 개발 중인 탄도미사일 현황과 미사일 관제 센터 위치 등 의미 있는 정보를 알려줬죠.”   성장사가 궁금합니다.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10살 때부터 군인이자 노동당원인 아버지와 살았어요.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죠. 뺨이 움푹 들어간 친구가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아사한 거예요. 5~6세 꼬마들이 들판에서 풀 뜯어먹는 걸 보기도 했어요. 중학생 때는 1년 반 넘게 학교 안 가고 놀았어요. 겨울에 난로조차 못 땔 만큼 열악하니 누가 학교 갈 생각하겠어요. 저처럼 고난의 행군 시절 중·고교를 다닌 82년생~88년생이 북한에서 최저 학력 세대가 된 이유죠. 그러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아버지 강권으로 벼락치기 공부 끝에 고교에 입학한 뒤 열심히 공부해 전교 3등으로 졸업했어요. 1, 2등 친구들은 해커부대로 빠졌어요. 북한은 전국 고교에서 수석·차석자를 해커부대로 데려가 전문가로 키워요. 북한 해킹 능력이 세계 3~4위권인 이유예요. 그 친구들이 휴가차 귀향했을 때 ‘네 부대에서 뭐하니’라고 물었더니 ‘말하면 안 돼. 스위스 은행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내는 게 방학 숙제야’라고 하더군요. 저는 전교 3위라 김일성대 갈 생각을 했는데, 국방대 가면 ‘군수 분야 간부 0순위’란 친구 얘기 듣고 시험 쳐 입학했죠.”   “친북 세력 의정활동 감시할 것”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뒤 청년 과학기술자가 됐는데요. “서울대 화학과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공대 인턴 하다가,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북한 국방대랑 수준차가 컸지만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끝에 1년 만에 수업을 따라잡았죠. 박사 딴 뒤에 현대제철 상무님을 만났는데 절 좋게 보셨는지 입사를 권유해 책임연구원으로 7년간 일했습니다. 자동차 변속기·기어 부품 개발 등 보람 있는 일을 했죠.”   국회의원이 된 경위는요. “지난해 12월 국민의힘에서 ‘인재로 영입됐다’는 전화가 왔어요. 한참 고민하다 전 정부 시절 유화 일변도 대북 정책으로 약화된 나라 안보를 살리려면 국회에서 일해야 한다고 판단해 응낙했습니다. 의원 임기가 시작되면 1호 법안으로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낼 생각입니다.”   우리 정치권엔 탈북자를 ‘배신자’라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전쟁 위협하고, 주민을 억압하는 북한 정권에 저항해 탈북한 사람이 왜 배신자입니까? 탈북 후 가장 큰 의문이 이렇게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친북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는 거였죠. 이번 총선에서도 친북 논란이 야기되어 온 진보당이 3석을 확보했지 않습니까. 앞으로 친북 세력의 국회 진입과 의정 활동을 규제·감시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4.05.01 00:32

  •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이 당에도 산화하는 사람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  국민의힘으로 광주 출마한 내과의사 박은식   강찬호 논설위원 8.62%.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광주 동·남을에 출마한 박은식 전 비상대책위원의 득표율이다. 더불어민주당 안도걸(70.16%), 무소속 김성환(16.15%) 후보에 이어 3등에 그쳤다. 세브란스 병원 내과 의사였던 그는 비례대표를 주겠다는 당의 제안을 뿌리치고 패배가 뻔한 고향에서 출사표를 던졌다. 동·남을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문충식 후보가 한자리 득표율로 낙선한 데 이어 2020년 총선에선 미래통합당이 공천을 포기한 불모지 중 불모지다.   ‘달걀로 바위 치기’였던 건가요. “부족한 제가 두 달 만에 고향 광주의 마음을 얻으려 했는데,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선거비용 보전 기준인 15%는 넘겨 동생뻘 청년들이 보수 후보로 광주에 도전할 자신감을 주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상대 당에 표 안 주기는 영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민주당은 대구·경북에서 30%, 부산·경남에선 40% 표가 나와요. 부산·울산·경남에서 5석 얻었잖아요. 여기처럼 9 대 1 구도면 정치가 존재하기 힘듭니다.”     ■  「 ‘총선서 보수 지면 망국’ 위기감에 고향 출사표 결심 보수 후배들 길 열어주려 강남·비례 출마 제안 거절 호남서도 여당 존재감 키워야…5·18 매도 이제 그만 지역 유권자도 보수에 최소한의 관심 보여주셨으면… 」    국민의힘을 상징하는 붉은 점퍼 차림으로 유세 도중 인터뷰에 응한 박은식 전 후보. 그는 “등 뒤의 건물 벽처럼 견고한 호남 정서를 넘지 못했지만, 여당에도 대의를 위해 산화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다”고 했다. 강찬호 기자 선거 운동, 어떻게 했나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뛰었습니다. 출퇴근 인사하고, 경로당 찾아다니며 ‘40년간 민주당만 찍어 좋아진 게 뭐 있나. 인구(142만)마저 대전(144만)보다 줄어 광역시 타이틀을 뺏길 판이다. 여당 찍어야 예산이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르신들은 ‘윤석열 꼴 보기 싫다’는 말만 하세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됐어. 그래도 민주당이야’ 하세요. 사전 투표 때도 힘들었어요. ‘난 민주당 찍고 왔어’ 하시니 기운 빠지죠. 여기 민주당 후보들은 공천되면 휴가 간다고 해요. 경선 끝나면 선거 끝난 거예요.”   대통령 욕에 뭐라고 답했습니까. “국회 가서 대통령에 할 말 할 테니 찍어달라고 했죠 (웃음). 저도 솔직히 의·정 갈등 못 푸는 것 보면서 (대통령에) 약간 실망했어요. 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이종섭을 대사로 보내나요. 물가도 그래요. 국민도 정부 탓만은 아닌 걸 아는데 굳이 ‘대파’ 논란을 만들 필요가 있었냐고요.”   첫 여론조사 5% 지지율에 경악   힘들었던 기억이 많았을 것 같은데. “명함 받으면 내던지고 찢거나, 침 뱉고 ‘비켜’ 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손 꼽을 정도였죠. 정말 힘들었던 건 지지율이 5%로 나온 첫 여론조사 때였습니다. 멘탈이 흔들리더라고요. (편 들어준 사람은 없나요?) 하루 많으면 7명 정도였습니다. ‘우리도 바뀌어야 해. 찍어줄게’ 하시더라고요. 참 고마웠죠.”   당 전략의 문제점은 뭐였나요. “선거는 바람이잖아요. 언론의 주목을 받는 후보가 저 외에 광주, 전남·북에서 5명씩은 있어야 했어요. 그나마 ‘한동훈 바람’을 기대했는데, 불 뻔하다 꺼져버렸고…. 어젠다도 실종됐어요. 586 청산? 이재명이 알아서 청산했잖아요. 민생? 대통령이 대파 흔드는 순간 종쳤죠. 이명박 정부 때 ‘뉴타운’처럼 보수 가치에 충실한 카드 하나만 던졌더라도 좋았을 텐데….”   낙선하니 주변에서 뭐라고 하나요? “‘여당 비대위원이 꽃길 마다하고 왔는데 너무하다’ ‘여기는 여당의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들 하시더군요.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지해준 많은 분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광주에선 ‘야권이 대통령 탄핵선(200석) 얻지 못해 아깝다’는 분위기예요. 막판에 영남이 국민의힘으로 결집한 건 호남에서 이정현·정운천조차 안 되니까 ‘우리도 여당으로 뭉치자’는 심리가 작동했기 때문 같습니다.”   “한나라당 호칭 여전, 여당 존재감 0”   여당도 5·18 참배 등 제스처를 하지만, 진정성이 안 보인다는 지적을 받지 않나요. “국민의힘도 잘해야겠지만, 광주 유권자들도 생각을 바꿨으면 합니다. 5·18을 기념일로 지정한 대통령은 김영삼이었잖아요. 국민의힘도 이번 총선에서 호남 전 지역구에 후보를 냈고요. 집권당을 활용해야지, 배척만 하면 계속 고립되죠. 선거해보니 대권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뛰어봤자 ‘윤석열 싫어! 꺼져’ 하면 끝이에요. 명함 드리면 ‘왜 빨간 당으로 나왔냐’고 하세요. 당명도 기억 못 해요. 국민의당, 심지어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잊을 만하면 5·18 망언이 여권에서 나오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5·18 때 광주 시민은 ‘북괴는 오판 말라’는 플래카드를 걸었고, 미국의 개입을 바라는 등 헌정 수호·친미 시위를 했어요. 그런데도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고 ‘폭도’라 매도하니 대화 자체가 안 돼요. 이게 지속되니 호남이 여당에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 힘들고, 민주당에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이 국민의힘 아닌 조국 신당으로 가버렸어요.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개혁당 찍은 비율이 여기가 제일 높아요. 답답합니다.”   광주 출마에 가족들 반응은. “지난해 김기현 대표가 혁신위원장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부했어요. 가족들 반대가 심했죠. 당에서 ‘비례 의원 아니면 텃밭(강남) 공천해 주겠다’라고도 했지만, 그것도 거부하고 ‘정치하게 된다면 광주 출마하겠다’고 했어요. 이어 비대위가 출범하면서 한동훈 위원장이 비대위원직을 제안했는데, 이건 가족들도 동의해줬어요. 보수진영에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때 광주 출마 결심을 굳혔죠.”   꽃길을 거부하고 험지 출마를 결단한 이유는. “누군가는 산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여당 사람들이 자극받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죠. 이 당은 호남 출신들이 고향 대신 양지만 찾아 출마하잖아요. 그러다 낙선해 명분도 실리도 잃고…. 호남 출신으로 자존심 상하죠. 그래서 비대위원 맡는 순간 내 소명은 광주 출마라고 확신했습니다. ‘박은식이 비대위원 되더니 결국 비례 공천받더라’는 말 듣고 싶지 않았죠. 내가 광주에 출마하면 여당의 수도권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고요.”   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고행길을 택한 심적 배경은 뭔가요. “‘총선에서 여당이 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어요. 사회과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보수의 가치에 확신을 갖게 됐고, 한국은 해양세력 주도의 자유시장 경제로 가야지, 중국에 굴종하던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출마를 결심한 거죠.”   망국을 걱정할 만큼 절박했나요. “과거 민주당은 그래도 헌정사는 존중했는데, 지금의 민주당은 나라에 애착심 자체가 없다고 봤어요. 나라에서 꿀 빨 거 다 빨고, 아이들 미국 유학 보내면서 사상은 사회주의·친북·친중이니, 애착심이 없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또 권력 잡으면 대륙에 종속됐던 조선 시대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광주 출마로 이어진 거죠.”   “박정희 덕에 기생충 소멸” 듣고 보수로   성장사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무안 출신 대학 강사, 어머니는 화순 출신 교사로 광주에서 사셨어요. 저도 초중고를 광주에서 나왔고요. 유복하진 못했지만 단란한 가정이었죠. 처가는 대구인데, 장인어른이 자식들과 5·18 묘지를 참배했을 만큼 열린 분입니다. 어릴 때는 당연히, 그냥 민주당이었죠. 한데 의대 입학해 기생충학을 배우는데, 교수님이 ‘박정희가 기생충 다 없애 우리 일자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시더라고요. 옛날엔 오물이 그대로 들어간 우물물 먹고 너도나도 기생충에 감염됐잖아요. 이거 막으려면 하수도 깔아야 해요.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 수교의 배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자재를 마련하고 하수도를 만들게 하니까 기생충 유병률이 확 떨어진 겁니다. 그때 처음 박정희의 긍정적인 면모를 깨달았어요. 또 의사가 돼보니까, 누군가 일을 해 가치를 창출해야 분배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죠. 최전방에서 군의관 복무하며 북한군의 현실을 목도하고, 보수 이념이 잘못된 게 아니란 확신을 얻었습니다.”   보수 논객이 된 건 조국 사태가 전환점인가요? “제 전문 분야잖아요. 조민 씨가 썼다는 의학 논문은 레지던트도 못 써요. 교수가 박사 조교들 데리고 피 뽑고, 동의서 얻고, 기계 돌려야 겨우 쓸 수 있어요. 그런 논문을 고교생이 썼다니 진짜 분노했죠. 그런데도 문제없다고 넘어가는 민주당 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선거비용을 한 푼도 보전받지 못했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후원금이 1억5000만원 들어와 큰 손해는 면했습니다. (거취는?) 일단 일상으로 돌아갈래요. 가정을 건사해야죠(웃음).” 강찬호 논설위원

    2024.04.17 00:32

  •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두겹 팬티, 항문... 마약 은닉술 상상초월, 촉 아닌 정보로 잡죠"

     ━  마약 단속 최일선 관세청 윤상우 조사관   강찬호 논설위원 지금 한국은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마약을 구할 수 있는 나라다. 필로폰 1회분이 피자 한 판 값인 2만~3만원까지 내려왔다. 마약사범도 2022년 1만8000명에서 지난해 2만8000명으로 55.5% 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마약과의 전쟁’ 최선봉은 관세청 조사관들이다. 2010~13년에 이어 2018년~현재 10년간 500여건을 적발해 450만명 투약분인 250㎏을 압수한 베테랑 조사관 윤상우(52) 인천공항세관 마약 조사 1과 팀장을 만났다.     ■  「 10년간 450만명분 적발,신변검색권 없어 애로  마약 은닉하는 은밀한 신체 부위, 남녀가 달라   텔레그램 이용 점조직 기승,‘총책’ 추적 난항 처벌 능사 아니나 형량 늘리면 유통감소 분명 」    테이프 떼자 하얗게 변색된 피부   압수한 대마를 들어보이는 윤상우 조사관. 그는 “지난해 압수된 마약의 83%가 관세청이 적발한 것이나, 조사관들은 신변검색 권한이 없어 애로가 많다”며 “또 마약조직이 이용하는 텔레그램·위챗은 발신자 추적이 불가능해 국제 공조 수사 확대가 절실하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처음 적발한 사례가 기억나시나요. “조사관 2년 차였던 2011년이었죠. 필리핀에서 인천을 거쳐 괌에 가려던 마약 운반범을 국정원 정보로 검거했어요. 탑승 전날 급하게 예약하고, 이전에 입국한 기록이 없는 점에 착안한 거죠. 이후 비슷한 유형의 여행자가 있는지 매일 전산망을 들여다봤는데, 한 달 뒤 똑같은 케이스가 나오더군요. 젊은 남자였는데 필리핀에서 골프백을 들고 입국한 뒤 괌에 가는 환승지였어요. 환승 구역에서 붙잡아 백을 X-레이 찍어보니 골프채 아래에 까만 음영이 발견됐어요. 거기 필로폰 1.7㎏을 은닉한 거죠. (초보 조사관으로 월척을 낚은 것 아닌가요?) 1명당 투약량이 0.03g이니 5만명분을 압수한 셈이죠.”   가장 기억나는 검거 사례는? “2018년 몸에 필로폰을 숨겨 들어오던 대만인들을 연속해 잡았어요. 그 뒤 대만인들이 딱 끊겼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검거한 대만인들 관련 자료를 분석해보니 우범 대만인들이 인천 대신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김포 입국 대만인들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죠. 역시나 며칠 뒤, 우범 대만인 4명이 김포공항에 입국할 예정이어서 바로 김포로 달려가 4명을 붙잡았죠. 필로폰 10㎏이 적발됐어요. 필로폰 넣은 비닐봉지를 배와 가슴, 허벅지에 감아 1인당 2.5㎏씩 들여오려 한 거죠. 전에도 여러 번 들어온 이들인데 다 무사통과 됐어요. 정보를 분석하고 추적한 덕분에 잡은 거죠”   마약을 몸에 숨기는 건 원시적 방법 아닌가요. “두꺼운 파카를 입은 데다 테이프를 빡빡하게 감아 겉으로 봐선 몰라요. 테이프 뜯어내면 피부가 하얗게 변색해 있습니다. 피가 안 통해 그런 거죠. 범인들도 ‘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은밀한 신체 부위에 숨겼다 적발된 경우는요?) 촉이 비상한 요원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잡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정보에 의존합니다. 숨기는 부위가 남성은 항문, 여성은 생식기가 많은 편입니다. 한국인이 대부분이죠.”   죄의식 없이 ‘알바’로 마약 나른 20대들   마약 조사관으로서 일하면서 애로도 있을 텐데요. “국정원·경찰발 정보를 근거로 용의자를 조사했는데 허탕 치고, 인권 침해 논란이 제기되면 힘들죠. 10건 중 2건 정도가 그렇습니다. 몸에 마약을 은닉한 정황이 분명해도 신변을 검색할 권한이 법에 명확히 규정되지 않아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도 애로입니다. 이물질을 3초 만에 감지한다는 밀리미터파 신변검색기를 도입했지만 100% 잡아내지는 못해요. 신변 조사 권한을 현실화하도록 법규를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검거된 이들은 ‘하선’(운반책)이니, ‘상선’(총책)을 잡아야 할 텐데요) 그게 제일 어려워요. 점조직인 데다 텔레그램·위챗으로만 연락하니 상선을 추적할 길이 없어요.”   가장 큰 실적을 낸 검거 사례는 무엇인가요? “지난해 1월 태국에서 케타민을 500g씩 숨겨 들여온 청년 2명을 검거했죠. 적발량이 34g을 넘었으니 규정대로 검찰에 넘겼는데, 검사가 ‘팀이 여럿인 조직적 범죄 같다’는 거예요. ‘20대 청년들이 한 달에 두세번씩 태국을 드나들며 속옷에 마약을 숨겨 들여오는 패턴이 똑같다. 모르는 사이처럼 여객기 좌석을 띄엄띄엄 예약한다’는 겁니다. 놔두기 아까워 ‘우리가 수사하겠다’고 했더니 검사가 응낙하더군요. 두 달 뒤 방콕에서 1인당 600g씩 케타민을 숨겨 입국한 청년 3명을 검거했어요. 팬티를 두 개 껴입고 그사이에 케타민이 든 봉지를 감췄더군요. 바지가 헐렁한 추리닝이라 겉으론 식별이 안 돼요. 이들은 ‘상선’이 지정한 방콕 호텔에 숙박하며 프런트에 맡겨진 마약을 찾아 입국한 거였어요. 결국 수사 개시 반년만인 지난해 8월 우리가 12명, 검찰이 15명 등 총 27명을 검거했고 케타민 17.2㎏을 적발했죠. 상선인 ‘큰 손’까지 검거했어요.”   조직을 일망타진한 거군요. “청년들은 강남 클럽 종업원들이었죠. 코인 투자했다가 빚을 진 이들인데 단골 클럽 손님이던 ‘큰 손’이 ‘돈 벌어 빚 갚지 않을래?’라며 유혹한 거죠. 큰 손이 처음엔 운반비로 1000만원 줬다가 500만원으로 내렸는데, 청년들은 그래도 좋다고 운반을 계속하다 덜미를 잡혔죠.”   러시아 권투선수 출신에게 맞을 뻔도   택배를 가장해서 마약사범을 잡기도 한다면서요. “지난해 베트남에서 들어온 녹차 봉지에서 대마 500g이 X-레이로 적발됐어요. 수취인을 보니 불법 체류 중인 러시아인이더라고요. 집배원을 가장해 그에게 전화해 ‘배송할 곳을 알려달라’고 하니 ‘인천 연수동 러시아인촌 편의점 앞에 둬 달라’고 해요. 편의점 문 앞에 ‘물건’을 두고 저를 포함해 요원 4명이 잠복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러시아인이 벤츠를 몰고 오더군요. 걸어올 줄 알았는데 좀 놀랐죠. 그가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집는 순간, 저희 4명이 덮쳤습니다. 전직 권투 선수라 저항이 거세 애 좀 먹었죠. 나중에 CCTV를 보니 주먹으로 저를 내려칠 기세였어요.”   관세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2년째인데요. “적발량이 늘었고 사기도 높습니다. 마약 조사과도 1개에서 3개로 늘었어요. 실적이 인사에 반영되고, 포상 규모도 커졌죠. (포상받았나요?) 태국 케타민 조직 일망타진 건으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검찰과 수사를 협력하는 모범을 보였다고 이원석 검찰총장이 주는 표창도 받았어요.”   ‘치료용’ 핑계로 급확산   마약 한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겉으론 멀쩡해요. 하지만 집에만 틀어박혀 살면서 웃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합니다. 안타깝죠. 이런 불행한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마약 사범 잡는 일을 60세 정년까지 계속하고 싶어요. (경력은요?)1999년 관세청에 들어와 2007년까지 통관 업무를 하다 마약 조사과에 배치됐어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고사했지만, 적발 건수가 늘면서 보람을 느껴, 천직이 됐습니다. 지난해 압수된 마약의 83%가 관세청이 적발한 거예요. 덕분에 국내 필로폰 단가가 급등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보람이 큽니다. 글로벌 수사망도 커졌습니다. 태국·베트남·네덜란드와 협정을 맺어, 우리 조사관들이 그곳 공항에서 합동 수사를 하고 있어요. 이 3개국에서 여행자나 우편물·화물을 통해 국내에 마약이 많이 유입되기 때문이죠.”   한국은 2015년 ‘마약 청정국’ 지위를 잃고 ‘마약 천국’으로 전락했는데요. “예전엔 마약은 절대악이란 인식이 우리 사회에 있었죠. 술집·클럽에서 마약이 돌면 바로 신고가 들어왔는데 요즘은 묵인되는 분위기에요. 병원에서 프로포폴 같은 약품을 쉽게 처방해주니 ‘치료용’이란 핑계로 마약이 죄의식 없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코인 투자 빚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청년들이 느는 것도 큰일이고요. 또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져, 전남 낙도에까지 마약이 돌더라고요.”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나요? “맞습니다. 재활시설 확대 등 구조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그러나 처벌이 강한 나라일수록 마약 유통이 감소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마약사범을 사형에 처하는 싱가포르가 대표적이죠. 중국도 예전엔 우리나라에 필로폰을 가장 많이 유입시키는 나라였는데 마약사범을 엄벌하면서 반출량이 급감해 동남아에 지위를 내줬어요.”   과거 정부가 마약 단속에 소홀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저희는 쭉 열심히 했는데….” 강찬호 논설위원

    2024.04.03 00:49

  •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10시간·8000㎞ 산소마스크 쓰고 비행…미 공군도 엄지 척!

     ━  극강 공중훈련 ‘레드 플래그’ 두 번 완수 윤지훈 소령   강찬호 논설위원 미 공군이 주관하는 세계 최고·최대 다국적 연합 훈련인 ‘레드 플래그 (Red Flag) 알래스카’를 두 번이나 완수한 공군 에이스를 만났다. 공군 20 전투비행단 조종사 윤지훈 소령(38·공사 57기). 2017년과 지난해 서산 공군 기지-알래스카 간 8000㎞를 논스톱으로 10시간씩 왕복하는 극한의 비행을 해냈다. 비즈니스석 앉아 가기도 힘든 10시간을 몸만 겨우 들어가는 조종석에서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의 KF-16U 전투기 대당 가격은 약 420억원. 이런 고가의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 1명을 키우는 데만 100억원이 넘게 들어간다.   가장 큰 애로는 뭐였습니까. “알래스카까지 고도 6~10㎞의 고공을 날면 체내 산소가 60%대로 떨어집니다. 10시간 내내 산소마스크를 쓰고 가야 하죠. 조종석이 비좁아 1㎝도 움직일 틈이 없으니 다리가 저리고 온몸이 굳는 점도 큰 고통입니다. (용변은요?) 소변은 조종복 속옷에 붙은 플라스틱 컵에 봅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모터가 돌며 소변이 컵에 연결된 주머니에 들어갑니다. 지난해 도입된 첨단 장치죠. 저는 10시간 내내 참아, 쓸 기회는 없었습니다. (대변은요?) 그건 해결이 안 돼 보통 지사제를 복용하는데 저는 전날 세끼 다 굶는 거로 대비했죠. 비행 도중 초코바·육포·소시지로 허기를 달랬어요. 소변이 걱정돼 수분 없는 것만 먹은 거죠. 또 졸면 큰일이니 알래스카 시차에 적응하려고 비행 나흘 전부터 낮 4시 취침, 자정 기상을 반복했고 졸음 쫓는 각성제도 의무대에서 받아뒀습니다. (마약 아닌가요?) 아닙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부작용 우려가 있어 검사 통과자에게만 처방하죠. 공중 급유도 실패하면 연료가 바닥나니, 긴장감이 엄청납니다.”     ■  「 대소변 참고 서산~알래스카 논스톱 비행 4번 공중급유 받으며 420억원 KF-16 6대 이끌어 산소통 새 예비기지 비상착륙, 아찔한 경험도 북한 공군 적수 못 돼, 중·러 진입 차단에 중점 」    1800시간 비행, 1500회 출격 기록에 이어 레드 플래그를 두 번 완수한 윤지훈 소령. 스마트 폭탄 탑재가 가능한 공군 주력 전투기 KF-16U가 그의 애기(愛機)다. 2020년 비행 기량·작전 기여도 등에서 고득점해 우수 조종사상을 받았다. 같은 연배 조종사는 비행시간이 1000시간 정도다. 장진영 기자 공중 급유는 어떻게 받습니까. “급유기에 급유를 요청하면 ‘붙어도 좋다’고 클리어(허락)합니다. 서로 시속 500㎞를 유지하며 길이·너비·폭 1m의 가상 큐빅 안에 급유기의 급유 파이프와 제 전투기의 급유구가 들어가게 조정합니다. 딱 맞으면 그린, 벗어나면 옐로, 더 벗어나면 레드 사인이 디스플레이에 뜹니다. 말이 쉽지, 난기류라도 닥치면 큐빅 안에 급유구 넣기가 정말 힘듭니다. 베테랑 조종사도 3분이 걸릴 수 있죠. 사방이 컴컴한 야간 비행 때는 대형 유지가 더 어렵습니다. 다만 급유 파이프가 ‘턱!’ 하고 꽂히면 그 흡입력이 내 전투기를 꽉 잡아줍니다. 그때는 기분이 좋죠.”   급유 때 위기는 없었습니까. “총 6대를 이끄는 페리팀장(편대장)으로 참여한 지난해 훈련 귀국 길에서의 일입니다. 편대 4번기에서 산소 저장통이 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상공이었어요. 서산까지 가기도, 알래스카로 돌아가기도 애매해 걱정이 됐죠. 마침 1000㎞ 지점에 미군의 콜드베이 예비기지가 있더라고요. 4번기 연료를 체크하니 거기까지는 갈 분량이었어요. 남은 산소량도 버틸만한 수준이었고요. 즉시 4번기와 그 짝인 3번기에 콜드베이행을 지시했고, 두대 모두 콜드베이에 무사 착륙해 정비를 받은 뒤 귀국했습니다. 판단이 조금만 늦었어도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편대원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위기를 면한 거죠.”   우리 공군의 공중 급유 수준은. “제가 처음 레드 플래그에 참여한 2017년만 해도 미군기로 급유를 받았죠. 날아온다던 미군 급유기가 ‘정비에 문제가 생겼다’며 오지 못해, 일본 요코타 기지에 착륙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독자 급유’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의 급유 능력이 미군과 전혀 차이가 없어요. 지난해 레드 플래그부터 우리 급유기가 급유를 개시했고, 미군 전투기에도 급유를 해줬어요.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지기 직전에만 기름을 넣어도 되지만 전투기는 달라요. 태평양은 착륙 가능한 예비 기지가 1600㎞나 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유사시 이 기지까지 갈 수 있게 기름을 유지해야 하니, 심할 때는 20분마다 급유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알래스카 갈 때 10번, 귀국할 때 12번 급유를 받았습니다. 우리 급유기는 총 4대인데, 정기검사·비상대기에 2대가 소요돼 가용기는 2대뿐입니다. 반면 미국은 근 200대, 일본도 10여대에 달합니다. 늘려야죠.”   태평양 나는 기분은 어떤가요. “망망대해만 8시간을 나니까 극도로 지루한 데다 각성제를 먹어도 몽롱한 상태가 됩니다. 후방석 후배와 얘기를 나누면서 졸음을 쫓았죠. 구름 낀 상황이 가장 힘든데, 전정기관 혼돈에 따른 비행 착각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전투기는 수평으로 나는데도 내 몸은 90도로 꺾인 듯 느껴지는 착각인데, 저도 겪었어요. 후방석 후배에게 조종을 맡기고, 훈련받은 대로 심호흡을 하면서 겨우 벗어났죠. 10시간 만에 알래스카에 내릴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 뻔했어요. 축하 세레머니로 맥주를 한 잔 주는데, 맛은 기막히지만 빈속이라 바로 취해요.”   무려 8000㎞를 날아가 훈련하는 이유는 뭔가요. “글로벌 선진 공군 지위를 다지기 위한 겁니다. 공중급유기와 장거리 폭격기·전투기를 운용해 다국적 연합 작전에 참여할 능력을 축적하는 거죠. 이런 수준의 공군 강국은 미국·일본·중국·러시아와 우리 정도랄까요.”   레드 플래그 훈련에 참여해보니 어떻던가요. “한반도보다 큰 훈련지에서 세계 최강 미 공군과 연합 능력을 축적했죠. 본부인 아일슨 공군기지는 국내 최대인 서산 공군 기지(11.9㎢·약 350만평)보다 25배나 넓고 활주로도 1.7배 길며 스키장까지 있어요. 매일 새벽 여기서 브리핑을 받고 훈련장까지 40분을 날아갑니다. 공중급유 받아가며 가상 적 기지 사격 등 실전급 훈련을 3시간 하고 돌아와 녹화영상을 보면서 훈련을 복기하면 12시간이 꼬박 지나 파김치가 됩니다. 맥주에 소고기로 늦은 저녁 먹고 쓰러져 자는 생활을 3주 내내 했죠.”   미 공군은 우리 공군을 어떻게 평가하던가요. “정확한 시각에 목표를 타격하고,가상적기를 막는 능력이 눈에 보인다며 ‘엄지 척’을 하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함께 참여한 일본 항공자위대와 비교됐죠. 미군들이 ‘일본 친구들의 전술이 뭔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미군과 소통이 잘 되나요?) 언어 장벽이 없을 순 없지만, 통상적인 군사 용어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훈련할 때도 영어로 하죠. 여담인데, 일본 자위대원들은 영어 발음이 잘 안 돼 우리가 미군들에게 통역을 해주기도 했어요. 미군 교관이 ‘단순한 훈련이 아니라 한미동맹의 소중한 자산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 게 인상 깊었죠.”   우리 공군의 핵심 타깃은 북한 공군입니까. “천안함·연평도 도발이 터진 2010년대 초만 해도 그랬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는 중국·러시아 군용기의 우리 방공식별구역 무단 진입이 잦아져 그쪽 대응 비중이 커졌습니다. 나란히 붙어 비행하며 나갈 때까지 감시합니다. 더 안으로 들어오면 진로를 막아서는 ‘차단 기동’을 하는데 횟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북한 공군은 이제 상대가 안 돼요. 1980년대산 미그기가 최신 기종이죠. 퇴역한 팬텀기 수준이에요.”   비행하면서 힘들었던 일은 뭔가요. “공중전 하다 보면 중력 가속도가 급변해 온몸의 피가 하체로 쏠리면서 기절하고, 숨지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그래서 3년에 1번씩 청주 훈련 센터에서 지구 중력(1G)의 9배인 9G에서 15초간 버티는 훈련을 받습니다. 일반인은 4G만 가도 실핏줄이 터지고 2~3초 만에 기절합니다. 하체에 힘주고 ‘흡’하며 가슴을 압박하는 ‘L1 호흡법’을 숙달해야 합니다. 또 고도 3000m 이상 올라가면 중이통·감압증에다 혈액 내 질소가 기포로 변해 위독해지기도 하죠. 기동 훈련 때 쥐도 많이 납니다. 매일 1~2시간 달리기·근력 운동을 하고 1시간 반 비행 훈련으로 보완하죠.”   그래도 보람 있습니까. “그럼요! 야간 비행하면 수도권 상공의 불빛이 정말 화려합니다. 하지만 북방한계선(NLL) 근처로 올라가면 칠흑 같은 북한 지역이 눈에 들어오죠. 그 상반된 모습을 보면 ‘이렇게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영공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죠.” 강찬호 논설위원

    2024.03.20 00:32

  •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실제 일해봤더니 ‘선관위원장=바지사장’ 말에 공감”

     ━  의료대란·선관위 지원 주무 이상민 행안부 장관   강찬호 논설위원 4·10 총선을 앞두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체적인 투개표 시스템 개선을 지원하는 데 열심이다. 정부 유일의 선거 지원 부처인 행안부 수장으로서의 행보지만, 자칫하면 오해를 부르거나 야당의 공격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 왜 이 장관은 발 벗고 나선 것일까? 무슨 계기가 있을까?   2020년 총선 ‘부정 논란’이 기폭제   “변호사 시절인 4년 전 총선 때였죠. 부정 선거 논란이 거셌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저명인사들이 계속 얘기를 해 들여다보니 좀 이상한 것들이 있는 거 아닌가….”     ■  「 현직 판사 재판 바빠 선관위 업무 챙기기 어려워 부정선거 인정 않지만 투개표 허점 개선은 필요 사전투표 현장 날인, 불편 없고 시간도 안 걸려 아직 공공병원은 여유…전공의들 일단 복귀하길 」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선거 지원 주무 장관으로 처음 치르는 총선이 승자든, 패자든 승복할 수 있는 투명한 선거로 치러져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선관위의 자체 개선 노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고 강조했다. 강정현 기자 그게 뭐였나요. “투표 분류기에 대한 불신이었죠. 이건 지난해 하반기에 국정원이 ‘점검 결과 문제가 있다’고 공식 발표했어요. 또 하나는 개표 과정에서 선관위 서버가 해킹돼 전산 집계가 실제와 달리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었습니다.”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보는 겁니까. “아닙니다. 딱 부러진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렇다고 할 수 없죠. 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선관위가 개선에 나서, 이번 총선은 부정 시비가 상당히 줄 것 같아요. 그러나 사전 투표에서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는 부정한 투표지가 양산될 우려고, 다음은 이 투표지가 투표함에 투입돼 카운트될 우려죠. 이를 막을 방법은 선거법에 정해진 대로 사전투표 관리관이 투표지에 자신의 도장을 날인해 교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관위는 이를 인쇄 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고, 관인이 미리 인쇄된 투표지를 교부해왔죠. 규칙이 상위 법률을 어긴 셈이라 법대로 할 것을 제언했는데, 선관위는 ‘투표 시간이 길어지고 공무원 동원이 어렵다’며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사전투표지를 그야말로 ‘졸졸졸’ 따라다닌다는 전략입니다. 부정 선거 주장하는 분들은 ‘투표지가 우체국에서 선관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바꿔치기 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론상으론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전투표지가 해당 선관위에 도착할 때까지 전 과정을 경찰관이 따라붙을 예정입니다. 경관 3000명을 투입키로 경찰청과 얘기가 끝났습니다. 또 사전투표지가 해당 선관위에 도착하면 바로 투표함에 넣어야 하는데, 심한 경우는 2~3일 뒤에야 투함됐습니다. 그때까지 바구니 같은 데 보관돼 논란이 됐죠. 그래서 사전투표지가 선관위에 도착한 뒤 투함될 때까지 과정도 CCTV로 찍어야한다고 선관위에 얘기해둔 상태입니다.”   선관위는 현장 날인하면 시간이 늘어진다는데. “시뮬레이션을 해 봤습니다. 총선 당일 오전 6시에 ‘땡!’ 하고 투표소 문이 열리자마자 100명이 입장하는 극단적 상황이라 가정합시다. 사전투표지 발급기가 8대, 날인 담당 관리관이 1명 배치된 가운데 현장 날인을 한 경우, 100번째 투표자는 오전 6시 13분 투표를 완료했어요. 기존 방식대로 할 경우에도 100번째 투표자는 6시 13분에 투표를 완료했죠.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투표자마다 신원 확인·투표지 발급에 1분이 걸리는데 그 사이 투표지 8개까지 도장을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관위는 현장 날인할 공무원 동원도 어렵다는데요. “그 이유는 보상, 즉 수당과 휴가가 미흡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당을 3만원 올렸습니다. 총선에 수고하실 공무원이 40여만명이니 100억원 넘는 액수죠. 또 휴가는 여태까지 없었던 최장 이틀 휴가제를 시행하려 합니다. 사전투표일은 주말인 금·토요일이고, 본 투표일(수요일)도 국민이 쉬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토·수요일 근무자는 이틀, 금요일 근무자는 하루를 쉬게 하도록 대통령령으로 못 박을 방침입니다. 이르면 6일 입법 예고할 계획입니다. 중앙일보에 처음 알려드리네요.(웃음)”   지역 선관위원장, 겉핥기 업무 불가피   판사 시절 시군구 선관위원장을 지내셨는데. “여천·소사와 원주시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사실 부끄러웠죠. 재판하기도 바빠 선관위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사무국장이 안건 보고하면 대충 의결하고, 나머지는 보고만 받은 뒤 선관위원들과 저녁 먹고 헤어지는 식이었죠.”   보고로 끝날 게 아니고 따져볼 사안도 있지 않았나요. “부끄럽다고 얘기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회의 끝나고 바로 (식당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시락 먹으며 회의 계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선거 당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선관위원 9명이 두 세 패로 갈려 투표소 둘러보고, 저녁 때 개표 상황 보면서 앉아 있었죠. (그러다 사고 터지면 책임은 위원장이 진다던데요?) 그렇죠. 책임지는 거죠.”   시군구 선관위원장을 지낸 전직 판사가 ‘난 바지사장이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런 개념이죠. (공감하시나요?) 네네. 법조인의 선관위 참여는 좋지만, 현직은 재판 부담이 너무 심해 제대로 일하기 쉽지 않아요. (상근 위원장 도입에 찬성하시나요?)그렇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소회가 계실 텐데요 “지금 말하긴 적절하지 않고, 이태원 특별법이 국회에서 처리되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특별법 초안에 심정이 담긴 것 아닌가요?) 특별법의 의미로 가장 큰 것은 희생자 분들을 진심으로 기억, 추도하고 유족들의 정신적·실질적 고통을 치유해드리는 거죠. 돈을 벌던 자녀가 숨져 생계가 어려워진 부모님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을 돕는 내용도 있습니다.”   공공병원 응급실 환자 오히려 줄어   이 장관은 ‘의료 대란’ 주무 장관이기도 하다. 그는 “전공의들이 지금이라도 빨리 복귀하면 의사 면허를 유지할 길이 있다”고 강조했다.   업무 개시 명령에도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들에 처벌이 4일 개시됐는데. “시한은 지났지만, 빨리 복귀하는 이와 늦게 복귀하는 이의 처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명령을 송달받고도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는 바로 면허를 정지할 수 있고, 복지부가 고발하는 즉시 수사기관에서 소환할 겁니다. 주동자는 구속 수사도 가능하고요.”   행안부가 담당하는 공공 의료기관은 어떤 상태인가요. “상급 종합 병원이 수용 못하는 환자들이 공공 의료기관으로 넘어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는데, 현재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지난주 저와 차관이 전국을 돌았는데, 여력이 충분히 있고 응급실은 오히려 환자가 줄었어요. 의원(개인 병원)을 가도 되는 경증 환자들이 상급 병원 응급실로 오곤 했는데, 요즘은 의료 대란을 의식해 ‘상급 병원 가면 치료 못 받는다’고 여겨 동네 의원을 찾고, 공공 병원에는 중환자만 오니 환자가 준 것이죠. 아이러니한 일인데, 어떤 면에선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상급 병원 응급실 상황은 어떤가요. “거리로 나선 전공의들이 대부분 그쪽 소속이니 난리 났죠. 그러나 정말 응급치료가 필요한 중증 환자들만 상급 병원을 찾고 있어 환자 수도 줄었습니다. 또 공공 병원은 전공의가 많지 않은데다, 저희가 진료시간을 평일 기준 2시간 연장했고 휴일·야간 진료와 함께 군·보훈병원도 개방해 상급 병원에서 내려온 환자들까지 충분히 감당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수요가 초과될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3차 상급병원에서만 치료 가능한 환자들이 감당의 한도를 초과할 경우가 위험한데, 현재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듯합니다. 결국 전공의들이 빨리 복귀해야 합니다. 행정부로선 복귀 시한을 넘기면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빨리 복귀하는 이는 선처가 가능한가요. “네. 주동자는 몰라도 소극적으로 참여한 이는 신속히 복귀하면 의사면허를 유지할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행정부는 고발을 안할 수 없지만, 검경과 법원에선 빨리 복귀하는 전공의일수록 기소·선고유예나 벌금형 등 면허가 유지되는 선에서 선처할 공산이 큽니다. 반면 늦게 복귀하면 집행유예 이상 형을 받을 우려가 커지고, 그러면 면허가 무조건 박탈됩니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4.03.05 00:57

  •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서울대는 입학생 아닌 졸업생으로 승부해야”

     ━  무전공 개혁 선봉 유홍림 서울대 총장   강찬호 논설위원 무전공 선발 확대와 융합형 학제 개편 등 주목할만한 개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유홍림 서울대 총장을 만나 2시간 동안 속내를 들었다. 그의 개혁안은 교육·학문적 차원을 넘어 인구 소멸과 대결 정치 등 ‘수축 사회’의 불길한 징후에 휩싸인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국가적 고려가 깔려 있었다. 플라톤·아카데미 등 본인이 전공한 서양정치 사상의 밈(meme)이 대화 내내 등장한 인터뷰는 19일 서울대 총장실에서 진행됐다. 유 총장은 지난 1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  「 4년 학제를 5~6년 학·석사제로 바꿔야 융합형 인재 양성 무전공 도입해도 밀착 지도하면 쏠림 현상 방지할 수 있어 일본, 대학에 10조엔 투자…정부도 연구 펀드 조성해야 쪼그라든 나라 살리려면 학문 공동체 등 중간영역 살려야 」    청주 출신인 유홍림 총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박사를 받고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를 지내다 지난해 총장에 당선됐다. 온화한 성품 속에 강한 추진력을 겸비한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을 받는다. 김경록 기자 융합형 인재 배출이 대학의 소명   취임 1년 소회와 향후 구상은. “취임사에서 ‘이제 서울대는 입학생이 아니라 졸업생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했다. 원고에 없었지만 중요한 얘기여서 현장에서 말한 것이다. 르네상스·산업혁명 등 대전환기엔 늘 대학의 역할이 있었다. 지금도 격변의 시대다. 내년 종합화 50년을 맞는 서울대는 격변기에 소명을 다 할 융합형 인재를 배출할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대전환 시대를 이끄는 학문 공동체’를 비전으로 정하고 12개 과제를 구체화했다. 그 첫째가 융·복합적 인재 양성이고 둘째가 과학기술의 가치 창출이다. 서울대는 종종 국민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대에 대한 기대의 반증 아닐까.”   학생 이전에 교수들이 융합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교수가 개별 학과를 넘어 대학원·단과대학에 소속될 수 있도록 학칙 6조를 개정했다. 대학 교육의 초점은 지식 전수가 아니라 역량 강화다. 지금 같은 융합의 시대엔 학문 간 ‘공통의 핵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1·2학년생을 ‘학부 대학’으로 묶어 다양한 전공을 공부케 하고 ‘교양’도 공통 핵심 역량 과목들로 바꾼다. 수업도 여러 분야 교수들이 들어와 학생들 앞에서 토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답이 없는 질문을 융합식으로 탐구하는 ‘팀 티칭’이다. ‘저출산’이라면 인구학·경제학 외에도 여성학·교육학·복지학 등 저출산 원인을 달리 보는 여러 분야 교수들이 토론을 벌인다. 학생들은 ‘이렇게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구나’라고 깨닫고 대안을 찾게 된다. 교수들도 서로에게 자극받기에 적극적이라 ‘팀 티칭’ 강좌는 많이 준비돼있다. 물리학·독문학·음악학 교수가 참여하는 ‘과학·음악·문학의 만남’이 있고 행정학·농학·미술학 교수의 ‘데이터로 디자인하는 리더십’도 있다. 리더십 연구에 미대 교수가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할 터다. 개인의 요구를 공공의 관심사로 제도화하는 게 리더십인데, 지식만이 아니라 감각도 필요하다. 이 강좌에선 매핑 데이터를 활용한 시각 디자인을 통해 그런 ‘감각’을 제시한다. 이런 게 융합이다.”   서울대 면접은 정답 아닌 역량이 척도   학부 대학을 마친 학생들이 인기 학과에만 쏠릴 것이란 우려는? “서울대가 10년간 자유전공학부를 운영한 결과 입학할 때 꿈꾼 전공이 다른 전공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분명히 발견됐다. 학부 대학에서 밀착 지도를 확대하고, 기숙 대학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 잠재력과 다양성이 함양돼 쏠림을 막을 수 있다. 이미 다전공 학생이 30%를 넘고, 4년 만에 졸업하는 이는 거의 없다. 졸업에 필요한 130학점을 넘겨 150~160학점을 듣는 학생이 많고 200학점 듣는 이도 있다. 1개 전공으로 평생 갈 수 없다는 걸 학생들이 먼저 아는 거다. 융복합 시대엔 제너럴리스트로 시작해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5~6년 학제로 바꿔야 한다. 다만 기존 전공들을 짜 맞춰 다전공을 하는 건 한계가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모노 스피커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스테레오는 안된다.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게 전공 융합·대단위화다. 학생 혼자 하긴 어려우니 교수들의 밀착 지도가 필요하다.”   응시생 면접을 1시간 넘게 하는 하버드대처럼 면접을 강화할 뜻을 내비쳤다. 면접관이 된다면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예시만 들겠다. 단, 이 문제를 내겠다는 건 전혀 아니다. 미국 미네르바 대학의 첫 번째 질문이 ‘Who are you? (너는 누구냐)’더라.  한두쪽짜리 자기소개서 갖고 답할 질문이 아니다. 이렇게 미래에 닥칠 질문들은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학생의 종합적인 잠재력 측정이 (면접의) 척도다. 즉 서울대 면접은 정답이 아니라 역량을 본다.”   의대 열풍을 막으려면 국가 차원에서 이공계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했다. “맞다. 이공계에 주어진 병역특례가 효과적이었다. 이제는 4년 전액 장학금에다 생활비 및 석사 학위 비용까지 제공해야 한다. 재원이 문제인데, 2015년 도쿄대 등 4개 대학에 정부가 1조엔을 투자한 일본에 주목한다. 일본 대학은 우리보다 더 보수적인데도 기업과 연계해 산학 생태계 구축에 성공했다. 커리큘럼 설계까지 기업과 같이한다. 최근엔 10조엔 펀드로 확장했다. 무작정 주는 게 아니고, 경쟁을 시킨다.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는 자체 펀드가 60조원이 넘으니 100개 중에 하나만 성공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과감한 투자를 한다. 일본 대학은 그럴 돈이 없으니 정부가 개입해 성공한 것이다. 우리 정부도 여러 대학이 참여하는 대형 펀드를 조성하고 서울대에 허브를 맡겨야 한다. 우리 이공계의 몰락은 IMF 외환 위기 때 연구원들이 대량 실직한 탓이다. 따라서 이공계 인력이 평생 일할 수 있게 대학 중심의 대형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대는 양자기술과 2차 전지, 바이오 메디컬 연구소를 설립 중이다. 이공계 나와도 실직 걱정 없고 속된 표현으로 대박 나는 세상이 돼야 의대 열풍을 잠재울 수 있다.”   노벨상 나오게 국제 네트워크 강화 중   서울대가 도약하려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때 아닐까. “자연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랩(연구실)이 ‘네이처’에 논문 실리는 수준까지는 왔지만 그걸 넘어서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랩 간에 칸막이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 보면 대개 복수다. 국내외 학문 네트워크를 갖지 않고는 수상이 어렵다. 그래서 국내외 대학들과 협업을 구축하는 ‘서울대 아웃 리치’를 추진 중인데 그 와중에 서울대의 우수성을 발견했다. 스탠퍼드대 교수를 만났는데 ‘서울대가 2차 전지 연구 성과가 탁월하다’고 하더라. 앞으로 서울대·스탠퍼드대 교수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사회 돼   나라가 ‘수축 사회’로 가고 있다. 타개책은. “지금 우리 사회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자연 상태’를 연상케 한다. 인구 감소만이 수축이 아니다. 난 수축이란 말을 듣고 ‘중간 영역이 수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중간 영역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있는 커먼(common·각종 공동체)과 퍼블릭(시민사회)을 뜻한다. 국가는 생리적으로 시민단체나 공동체를 독점하고 싶어하는데,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가에 장악되는 상황이 됐다. 개인은 개인대로 물질·개인주의만 남으면서 강한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기 원하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 개인과 국가가 직접 연계되면 강압적 권력이 강화된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우려했던 ‘연성독재(Soft Despotism)’가 이것이다. 해소책은 커먼, 퍼블릭 등 중간 영역이 살아나는 거다. 서울대가 학부·기숙 대학 같은 융합과 소통의 커먼을 만드는 것도 중간 영역 활성화의 목적이 있다.”   정치 사상학자가 첨단 과학 융합에 열정적인 건 뜻밖이다. 배경이 있나. “초등생 때 슈바이처 자서전을 읽고 의사에의 꿈을 품으며 과학 잡지를 열독했다. 고교 때는 친구 따라 문과 갔지만, 기술 등 이과 과목도 다 배웠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택한 것도 가장 넓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배경 아닐까.”   독자에게 권할 책이 있다면. “독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의 조건인 ‘마음의 경작(Cultivation)’이다. 링컨은 셰익스피어를 외우다시피 통독하며 얻은 공감력으로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추천할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국가』와 『향연』이다. 어떤 진리가 담긴 건 아니지만, 사고력을 길러 절제와 관용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4.02.21 00:40